정부재정

정상적인 시장경제에서 시민의 사유재산을 강제로 가져가는 주체는 정부와 강도밖에 없다. 후진국으로 가면 이 양자의 구분이 애매할 때도 있다. 조세정책의 경우 표면적으로는 경제 논리에 의해 합리성이 유지되는 듯해도 그 이면에는 정부와 납세자 간의 관계 설정이 깔린다. 나라 살림의 재원을 마련해야 하는 정부로서는 다른 정책에 앞서 세금부터 거두어야 한다. 반면 납세자는 자신이 내는 세금에 비해 돌려받는 정부서비스가 부족하다 여기면 반발할 것이다. 그런데 정부가 세금의 반대급부로 제공하는 서비스의 상당 부분은 납세자가 피부로 느끼기 어려운 것이 많다. 그래서 정부는 억울할 수 있다. 

설사 정부서비스 자체에는 수긍하더라도 남들이 내는 세금에 대해 불만을 느낄 수도 있다. 비슷한 처지의 다른 사람이 자기보다 세금을 덜 내면 억울하고, 잘 사는 사람이 세금을 충분히 내지 않는다면 불쾌할 것이다. 공정하지 않다 느끼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식의 공정은 누가 기준을 정해주는 것이 아니라 납세자 스스로 느끼는 것이기 때문에 갈등이 발생하기 쉽다. 능력에 따라 세금 부담을 차별하는 ‘수직적 형평’이나, 비슷한 사람은 비슷하게 과세하자는 ‘수평적 형평’ 개념은 듣기에는 그럴듯해도 현실 문제로 들어오면 정책에 응용할 여지가 기대만큼 크지 않다. 부자가 얼마나 더 세금을 내야 하는지, 비슷한 처지를 어떻게 정의하는지를 객관적으로 정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설사 이런 문제들이 상당 부분 해소된다 해도 세금을 웃으며 내는 사람은 많지 않다. 다수의 시민이 ‘못마땅하지만 그래도 세금은 낸다’ 정도의 납세의식을 가진 나라라면 이는 대단한 선진국이다. 

세금의 절반은 정치다. 납세자 외에도 다양한 이해당사자가 존재한다. 정치인은 한 표라도 더 얻는데 유리한 방향으로 세금을 이용하려 들고, 관료는 예산 확보를 위한 세수 늘리기에 초점을 둔다. 교과서에 나오는 정부는 국민 후생을 절대 선으로 여기지만 현실의 정부 구성원들은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따질 수밖에 없다. 이처럼 세금은 누구나 관심이 있고 누구나 한마디 씩 하는 주제이다. 돈이 걸려 있어서 그런지 만족하는 사람보다 불만인 사람이 많다. 살면서 가장 피하고 싶은 것이 ‘세금과 죽음’이라는 말이 동서고금을 관통하는 진리가 된 지 오래다. 

다른 정책에서는 경제학자의 정책적 비교우위가 높지만, 조세 분야로 오면 뒷전으로 밀리기 쉽다. 손에 잡히지 않는 ‘효율’ 같은 개념보다는 ‘형평’이나 ‘정치’나 ‘세수’가 조세정책의 현실적 결정 요인이 될 가능성이 높다. 물론 조세가 자원배분의 효율, 즉 성장에 미치는 효과를 파악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전문가들의 관심도 이 주제에 집중되어 있다. 복잡하고 원칙 없는 조세 제도는 높은 사회적 비용을 초래하는데, 이는 곧 아까운 국가 자원의 낭비를 의미한다. 따라서 성장이나 분배와 같은 기본 목표를 전제로 그 나라의 경제 환경에 맞는 좋은 조세제도를 정립하는 것은 조세정책의 기본 과제이다. 하지만 현실 정책은 경제적 합리성보다는 이해당사자들의 정치적 득실에 따라 좌우되는 측면이 크다. 좋은 의도만으로 좋은 정책이 만들어지기 힘든 대표적 분야가 조세이다. 성장에 필요한 세수를 확보하며, 그 과정에서 세부담이 공정하게 배분되고, 그 결과로서 분배가 향상된다면 좋겠지만 역사적 경험을 통해 볼 때 이런 성공 사례보다 그 반대의 경우를 찾는 일이 더 빠르다.

어떤 형태의 국가이건 스스로를 지탱하기 위해서는 재원이 필요하다. 돈으로 거두는 세금이 국가 재정의 기본이지만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으면 노역이나 현물로 대체하기도 한다. 병역도 넓은 의미에서는 일종의 세금으로 분류할 수 있다. 세금을 거두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장애물은 ‘정보’와 ‘저항’인데, 경제발전 초기일수록 이 문제가 심각하다. 정보가 부족하면 세금을 매기기 어렵고, 저항이 심하면 세금을 강제하기 힘들다. 물론 나라마다 정치 구조나 경제 환경이 다르기 때문에 유사한 생활 수준의 나라라도 조세부담 수준이나 구성이 다를 수 있다. 미국보다는 스웨덴이, 싱가포르보다는 한국이 GDP 대비 조세수입 비율이 높다. 

한 나라의 경제구조나 정치구조는 축적의 산물이다. 역사성이 강하다는 의미이다. 경제발전이나 정치발전이 유사한 나라들을 묶어 보면 대체로 조세정보나 저항과 관련해 비슷한 문제가 존재한다. 전문가들은 이런 점에 착안해 다양한 정책 처방을 내놓지만 통화정책이나 무역정책과 같은 일관성을 갖기는 어렵다. 비슷한 문제처럼 보여도 나라 고유의 사정을 반영하는 요인이 있기 마련이다. 따라서 선진국의 조세제도를 조건 없이 받아들이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2차대전 이후 오랫동안 복지국가를 추구했던 서구 선진국들은 1980년대로 들어서면서 보수 혁명의 길로 들어선다. 시대 정신 역시 ‘큰 정부’에서 ‘작은 정부’로 바뀌어 갔다. 조세제도 역시 이 흐름에 맞게 세율은 대폭 낮추고 과세베이스는 넓히는 식으로 개혁된다. 

그러나 이런 선진국식 개혁이 개도국에 그대로 적용될 수는 없다. 이미 조세부담 수준이 충분히 높은 선진국은 제도의 효율성을 증진시키는 ‘세수 중립적(revenue neutral)’인 개혁에 초점을 맞추었다. 하지만 대다수 개도국은 세수를 더 늘리는 방향으로의 제도 개혁이 절실하다. 물론 같은 세수 하에서는 효율비용이 작은 제도가 최선이지만 세수 압박을 받고 있는 정책 현장에서는 이런 고려를 할 겨를이 없을 수 있다. 한국 정부 역시 성장 재원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비전통적 조세 수단을 동원했다. 그 과정에서 제도는 복잡해지고 이에 따른 후유증이 작지 않지만, 어쨌거나 세수 목표를 달성한 데는 성공한 셈이다. 

조세의 정치성과 역사성은 국제 협력 차원에서도 두드러진다. 다수 국가 간의 자유무역을 목표로 추진됐던 GATT와 같은 무역협상은 1990년대 중반에 이르면 WTO와 같은 다자간 협정으로 귀결된다. 하지만 조세분야의 다자간 협정은 시작조차 어렵다. 세상 어느 정부가 자국의 주권이나 다름없는 재정 문제를 애매한 공식에 맡기겠는가. EU 국가들이 유로화 탄생과 함께 통화연합(monetary union)에는 성공했지만 재정연합(fiscal union)에는 실패했다. 어쩌면 이것이 정치연합보다도 더 어려울 수 있다. 최근 미국이 주도한다는 다국적기업 과세도 생각만큼 쉽지 않을 것이다. 기업들의 힘이 센 탓도 있지만 나라마다 이해관계가 달라 절충점을 찾기가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지방 분권 문제도 조세의 정치성에서 자유롭지 않다. 분권의 이론적 장점은 주민의 선호에 부합하는 조세-지출 패키지를 지방 정부가 제공하는 데 있다. 연방제를 하는 미국이나 스위스를 보면 지방 정부들이 상당한 수준의 재정 권한을 갖는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지방자치단체들은 대부분 낮은 재정자립도를 보인다. 지역 간의 경제력 차이가 원인이기도 하지만 이들이 조세의 세목이나 세율을 결정할 권한이 없는 탓이 크다. 그러다 보니 단체장들은 자체적인 세수확보 노력보다는 중앙 정부의 보조금을 더 타려는 정치 활동에 목을 매기 쉽다. 

조세의 정치성과 관련한 다른 사례도 많다. 현금 거래를 줄이기 위해 1990년대 말에 시작한 신용카드 소득공제 관련 조세 지원은 한국 조세정책사에 남을 만한 성공사례다. 소비지출에서 신용카드와 현금영수증 결제 비율이 차지하는 비중을 보면 1999년에 15.5%이던 것이 2012년경에 이르면 90%를 넘어선다. 이제는 편의점에 가서 칫솔 하나 사도 카드로 결제한다. 경제 논리에 따른다면 이 제도는 목적 달성을 했으므로 폐지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지만, 그런 시늉이라도 보이면 납세자가 들고일어난다. 소득공제를 줄이는 것은 증세이기 때문이다.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부동산 과세도 조세 형평성 차원에서는 나름의 합리성이 있을 수 있다. 온 국민이 낸 세금으로 경제가 발전하고 그 덕에 땅값이 올라 부자가 된 사람들의 불로소득은 과세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현실을 보면 뭐가 뭔지 모를 정도로 복잡한 목표와 수단이 얽혀 있다. 이것이 부동산가격 안정 대책이었다면 결과적으로 실패한 것이고, 부자과세의 일환이었다면 과세 대상이 애매한 구석이 많다. 노후 보장 겸해 어렵게 마련한 집 한 채 가진 사람에게 그동안 오른 집값 토해내라는 식의 세금을 밀어붙이면 저항을 부를 수 있다. 진보건 보수건 다 좋은데 세금 문제만큼은 나라의 주인인 우리에게 물어봐야 한다. 그것이 어려우면 더 좋은 대안이 나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조세를 교과서나 논문에서 배운 전문가들이 가장 흔히 범하는 오류가 조세설계(tax design)와 조세개혁(tax reform)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이다. 조세제도는 백지에 그림 그리듯 만드는 것이 아니다. 이런 오류는 선진국 학자들도 마찬가지다. 경제 이론이 점점 추상적으로 변해가면서 모형에 조세(tax)의 ‘t’자 하나 써 놓고 무슨 대단한 정책 제안이나 한 것처럼 착각하는 사람들이 즐비하다. 물론 그런 기초이론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정책 현장에 응용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조세의 정치성도 고려한 이론과 정책이 개발되면 더 바랄 나위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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